⟪Vacuum Packing: delays and shrinks⟫
고주희, 송은채 2인전
2024. 10. 22 - 10. 27
어느 느린 포장
부패하는 시간
공기는 유기물을 분해한다. 0으로 되돌아가는 과정, 공기가 닿는 순간부터 분해의 시간은 물질마다 다르게 주어진다. 그렇기에 시간은 공평하지 않다. 이 세상의 대기에 노출되는 순간부터 물질은 죽음 쪽으로 이동한다.
‘진공포장 Vacuum Packing’은 음식물을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술로 잘 알려져 있다. 이는 가사 노동과 식재료 유통의 효율을 추구하게 된 결과로 탄생한 산물이다. 인간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음식물이 비닐 팩 사이에 있는 모습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생물의 진공포장은 비교적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반면, 소멸하여 공기 중으로 흩어지기 까지 인간보다 더 오랜시간이 걸릴 나무, 철근, 돌 등의 무생물이 진공 포장된 모습은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들은 야외에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어도 꽤 오랫동안 제 모습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인간의 가공이 없이도 잘 버틸 수 있을 것만 같은 딱딱한,오래된, 변화 없는, 굳은 것들은 진공 포장의 대상에서 밀려난다.
늘어지는 시간
고주희는 1기 신도시인 일산과 인접한 1990년대에 증축된 주거 단지에서 십여년 동안 살아 왔다. 이 지역이 신도시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는데, 인근 동네가 뉴타운 재개발 사업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신도시 거점에서 출발하여 외곽을 점령해나가며 개발 사업은 땅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신도시라고 부를 수 없는 곳에서 출몰한 90년대 중후반의 잔해들은 한 눈에 봐도 ‘그 시절’의 것처럼 느껴졌다. ‘그 시절’은 특정한 연도로 표기할 수 있는 기간 안에 생산되고 유행했던 사물들이 떠오르는 시기이지만 정확한 단어로 설명할수록 미끄러진다. ‘그 시절’ 속에는 비디오 테이프, DVD, 디스켓, 브라운관 텔레비전, 만화 영화가 있지만 또 그러한 세세한 단어만으로는 시절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
고주희는 ‘그 시절’, 즉, 국내 여러 지역에 비슷비슷한 신도시가 건설될 즈음 유행했던 인테리어를 짐작할 수 있는 가구들을 동네에서 수집한다. 작가는 그러한 가구들을 캐스팅한 작업의 보관함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행위는 시간을 보존시키는 것에 가깝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시간을 느리게 만드는 일이다.
축소하는 시간
디지털 이미지 편집 방식에 익숙하다면, 송은채의 그림이 확대나 자르기와 같은 의도적 편집을 거친 이미지의 일부라고 느낄 수 있다. 사람이 내뱉는 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에 서 있다고 생각했을 때 송은채가 그린 장면들은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보인다. 사물에 눈을 떼지 않으면 주위 풍경의 변화를 눈치챌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빽빽하게 들어선 젤리들, 물에 잠긴 채 클로즈업 된 얼굴 등, 송은채는 공기가 일제히 사라진 감각이 느껴지는 장면들을 그린다. 송은채는 사물과 사물, 인간과 인간 등 개별 요소가 모였을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관계에 주목한다. 아주 가까운 관계가되었을 때 느끼는 몰입의 순간 안에서, 누군가를 가까이 쳐다보는 순간 한정된 시야는 시간을 느리게 만들고 공간을 축소시킨다. 네모난 화면 안을 채우는 사물과 인간의 군집은 우연과 의도가 섞인 세계 속에서 조우하는 사건과도 같다. 전시 공간 안의 젤리는 어느 순간 사람으로 바뀌어 비좁은 장소에 들어선 인간들로 보이기도 하는데, 송은채의 몇몇 그림에서는 그 두 대상이 뒤섞여 있기도 하다.
전시의 제목인 ‘Vacuum Packing’은 각각 조형을 설치하고 그림을 그리는 고주희와 송은채의 작업을 독해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가까이에서 무언가를 장시간 들여다보기 위해서 공기는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 고주희는 진공포장의 목적 중 하나인 ‘오래두기’를 위해 일상의 사물들을 거두어 들이고, 그들이 처음 장소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상상한다. 송은채는 진공포장된 생물처럼 숨 막힐 듯 가까이에서 본 대상들을 화면 안에 배치해서 밀착된 감각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이렇게 두 작가의 ‘진공포장’된 것들은 행위와 의도를 오가면서 시공을 느리고 좁게 만든다.
글 | 강다원(독립큐레이터/@daoneekang)